1부 성년의 날 일러스트레이션 - 권신아

scene #1
일찍이 김광석은 노래했다. 또 하루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그렇게 말한 시인은 최승자다. 삼십 세에 대한 으리으리한 경고는 너무 흔하다. 스물 아홉 가을, 나는 갓난 아이에게 홍역 예방 접종을 맞히는 엄마의 심정으로 스스로를 다독였었다. 와라! 서른 살, 맞서 싸워주마. 절대 지지는 않을 테다. 그런 식의, 유치하지만 제법 비장한 각오도 했었다.



scene #2
성장은, 긍적적 의미로 충만한 단어다. 고통을 통해 정신의 키가 한 뼘 자랐으며 보다 성숙한 인간에의 길에 한발 다가섰다고 믿고 싶은 심정은 십분 이해한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합리화시키면 마음이 좀 현해질 수 잇을 것이다.
옛 애인의 결혼식 날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제 나는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되었다고 뿌듯해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왜, 어른은 울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걸까? 어른도 때론 흐느껴 운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아무도 알지 못할 때, 눈물 없이도 메마른 가슴으로 통곡한다. 그것이 이 도시의 비밀스런 규칙이다.


scene #3
모든 고백은 이기적이다.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고백을 할 때, 그에게 진심을 알리고 싶다는 갈망보다. 제 마음의 짐을 덜고 싶다는 욕심이 더 클지도 모른다.



4부 - 치명적인 것들 일러스트레이션 - 권신아
scene #4
서울은 과잉의 도시다.



넘치는 것은 권태로운 수사(修辭)만이 아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단 1초의 실수로 잉태되는 태아, 동서남북을 가로지르는 구불구불한 버스 노선, 무채색 반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걸어가는 표정 없는 중년 남자, 바람에 펄럭이는 모텔 주차장의 녹색 천막, 입술 부르튼 아르바이트생이 바코드를 찍어주는 24시간 편의점, 의도된 냉정들과 과장된 친절들. 모든 것이 흘러넘친다. 그리고 문패 없는 콘크리트 건물들도 곳곳에 숨어 있다.



scene #5
갈수록 뼈저리게 느끼지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기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 결혼에 대한 환상은 없었다. 결혼이란 뜨겁게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둘만의 공간을 이루어 오순도순 아옹다옹 행복하게 사는 행위라고 단순하게 정의 내리기에는, 몰라도 좋을 여러가지 것들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나만은 다를 거야' 낙관적 기대에 몸을 맡긴 채 무턱대고 풍덩 뛰어들기에 결혼의 강물은 너무 차고 깊어 보인다.



scene #6
사랑이 저무는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누군가와 이별한 순간이 도래하면 엉뚱하게도 오래전 운동회때가 생각난다. 줄다리기 시합. 청군과 백군이 동아줄 하나를 마주 잡고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그때 불현듯 한쪽에서 동아줄을 휙 놔버린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모든 것이 덧없다는 듯.그럼 다른 한쪽은 어떻게 될까. 게임의 승자가 되겠지만 그걸 진짜 이겼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게임이 끝나버렸는데 누가 승리자이고 패배자인지 가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이대로 줄을 놓쳐버리기에는 나는 지금 너무 힘겹다.


8부- 거의 모든 사랑의 법칙 일러스트레이션 - 권신아
scene #7
하나의 사랑이 완성되었다는 말은, 누군가와 영원을 기약하는 순간이 아니라 지난한 이별 여정을 통과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입에 올릴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랑할 때보다 어쩌면 헤어질 때, 한 인간의 밑바닥이 보다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깜은 행복하게 사랑하는 연인들보다 평화롭게 이별하는 연인들이 더 부럽다.


scene #8
어쩌면 우리들은 사랑에 대해 저마다 한 가지씩의 개인적인 불문율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문제는, 자신의 규칙을 타인에게 적용하려들 때 발생한다. 자신의 편협한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기준을, 타인에게 들이대고 단죄하는 일이 가능할까. 사랑에 대한 나의 은밀한 윤리감각이 타인과 충돌할 때, 그것을 굳이 이해시키고 이해받을 필요가 있을까.



scene #9
이 세상 거의 모든 사랑은 해피엔딩 아니면 배드엔딩, 결혼 아니면 이별이다. 그리고 이 세상 거의 모든 결혼에는 사랑이라는 그럴듯한 증거가 필요하다. 서른 두 살, 봄. 내 인생에는 절실한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는 부유하는 먼지처럼 하찮은 나를 가장 튼튼하고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줄 유일한 남자로 보였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은 반듯한 세계에 무사히 도착하기 위한 회소한의 알리바이였다. 내 입으로 결혼이란 말을 뱉은 뒤, 그를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역설이 거기 있었다.



*
생각보다 좋은 책이다.
표지만 보면 넘쳐나는 로맨스소설중 한 권처럼 보이는데 전혀 아니다.
서른을 넘어 서른 하나, 서른 둘의 인생을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 오은수.
나도 곧 서른 하나가 된다.
주인공과는 달리 결혼하고 아이가 있지만 은수의 이야기가 생뚱맞은 남의 이야기이진 않았다.
대한민국의 결혼을 앞둔 싱글 여성이라면 대부분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단순하지만 복잡한 지하철 노선도처럼 얽히고 설킨 인생.
아이구. 결혼을 앞뒀던 2004년의 가을과 겨울이 떠오르게 되더라.


**
책을 읽으면서 영화 '싱글즈'의 원작 소설 '29세의 크리스마스'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마구마구 피어올랐지만 읽어보지 않았으니 어찌 알까. (영화는 봤다)

2006/12/25 08:29 2006/12/25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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